시(詩)가 있는 마을/좋은 詩 감상

[스크랩] [시가 있는 아침] 저녁 / 엄원태

파라은영 2015. 5. 14. 10:38

[시가 있는 아침] 저녁 [중앙/ 2015.05.14]



    저녁 - 엄원태(1955~ )

    비 그치자 저녁이다 내 가고자 하는 곳 있는데, 못 가는 게 아닌데,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 저녁이다 저녁엔 종일 일어서던 마음을 어떻게든 앉혀야 할 게다 뜨물에 쌀을 안치듯 빗물로라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리라, 하고 앉아서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새 저녁이다 종일 빗속을 생각의 나비들,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젖어가는 날개 가진 것들의 젖어가는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저녁 되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늙어가는 어떤 마음과 다름없는 것을…… 뽀얗게 우러나는 마음의 뜨물 같은 것을…… 비가 그 무슨 말씀인가를 전해주었나 보다
    저녁…….


공중에 빗금 긋고 흐르는 비의 동선(動線)을 보고 “움직이는 비애”라고 표현한 것은 김수영이다. 비는 여기에서 저기로, 혹은 저기에서 여기로 움직이는 비애다! 엄원태의 시는, 비 그친 저녁, 가야 할 곳에 기어코 가지 못하고 부동(不動)하는 자의 번잡한 마음을 더듬는다. 못 간 것도 아니고 안 간 것도 아닌데, 어느덧 저녁이다. 이 마음 구석구석을 물들인 하염없음이라니! 당신은 먼 곳에 있는데 나는 뼛국물인 듯 뽀얗게 우러난 하염없음에 젖은 채 저녁을 맞는다. 이 저녁, 아픈 것은 내가 아니라 내 마음이 품은 그 사람이다. <장석주·시인>
출처 : 설지선 & 김수호
글쓴이 : 설지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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