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치자꽃 지는 저녁 [중앙/ 2015.05.07]
- 치자꽃 지는 저녁 - 오민석(1958~ )
치자꽃이 지는구나
치자꽃이 화장지처럼 구겨지다 마침내
비 뿌리는 저녁
어디 부를 노래도 남아 있지 않은
거리에서 당신은 당신일 뿐
이제 아무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아무도 과음하지 않는다
오직 몹쓸 詩人들만 남아
통음(痛飮)의 밤을 기다리는데
어리석은 자여, 이제 환멸도 잔치가 아니다
세상은 단정한 신사들의 것
누가 함부로 울어 이파리 하나 흔들리게 하리
희망은 버림받은 배들의 안주일 뿐
그 누가 남아 비애의 항구를 노래하리
푸르른 안개의 칼이여 길 건너
실비동태집에선 죽은 바다가 끓고 있다
당신은 이미 미아이므로
아무도 당신을 찾을 수 없다

치자나무는 꼭두서니 과의 상록 활엽 관목으로 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하얀 꽃을 피운다. 늦봄 저녁, 치자꽃 지는데 혼자 실비동태집에서 술을 마시는구나. 아무도 담배를 피우지 않고 과음하지 않는 시대에 문득 제 자신이 가여워졌나 보다. 걸핏하면 통음(痛飮)하던 시인들이 사라지자 “세상은 단정한 신사들의 것”이 되고 만다. 그들이 고안해낸 게 신자유주의 체제다. 하지만 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사는 게 갈수록 팍팍해지고 환멸스럽다! 힘들 땐 나도 혼자 안성시장 ‘영동집’에서 얼큰한 두부찌개를 놓고 찬 술을 마신다.< 장석주·시인>
출처 : 설지선 & 김수호
글쓴이 : 설지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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