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마을/신문에서읽는詩

봄밤의 귀뚜리 ―이형기

파라은영 2015. 12. 18. 11:14
 

봄밤의 귀뚜리 ―이형기(1933∼2005) 

봄밤에도 귀뚜리가 우는 것일까. 
봄밤, 그러나 우리 집 부엌에선 
귀뚜리처럼 우는 벌레가 있다. 
너무 일찍 왔거나 너무 늦게 왔거나 
아무튼 제철은 아닌데도 스스럼없이 
목청껏 우는 벌레. 
생명은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열심히 울고 
또 열심히 열심히 사는 당당한 긍지, 
아아 하늘 같다. 
하늘의 뜻이다. 
봄밤 자정에 하늘까지 울린다. 
귀를 기울여라. 
태고의 원시림을 마구 흔드는 
메아리 쩡쩡, 
메아리 쩡쩡 
서울 도심의 숲 솟은 고층가 
그것은 원시에서 현대까지를 
열심히 당당하게 혼자서도 운다. 
목청껏 하늘의 뜻을 
아아 하늘만큼 크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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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8.금.동아일보.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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