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 이재무(1958~)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슬픔이 기쁨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
집에 있다.”(전도서 7:3~4) 우연히 이 대목을 접하고 오랫동안 그 의미를 골몰히
생각한 적이 있다. 인생이 만만치 않은 것이, 즐겁고 행복할 때 우리는 삶의 본
질을 자주 잊어버린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프고 슬플 때 “무릎을 꿇고/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지혜를 경청”하게 된다. 시는 이렇게 ‘헛것’들에 눈먼 우리들
을 불러 어떤 본질과 대면케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누구나 외면하려 드는 “슬픔”
을 오히려 “생활의 아버지”라 명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에게 무릎을 꿇”는
행위는 굴복이 아니라 지혜로 가는 길이다.
<오민석 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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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월.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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