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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퇴임사

파라은영 2012. 11. 1. 14:03

 

에필로그....

 

빛바랜 앨범에 쌓인 먼지를 턴다.

30여 년 전 첫 출근하는 서울소년원 현관에는“경험의 재구조로 성행 교정”문구가 걸려 있었다. 해석에 긴 시간 보내고, 이해하는데 수년 걸리고, 적용할 때 되니 정년이다.

 

우에무라 나오미는 북극해 12,000Km를 단독으로 횡단한다. 열세 마리 개와 1년 2개월간 설원을 달리는 장엄한 드라마. 어둠 내리는 설원 멀리 불빛이 가물거렸다. 숨 멎을 듯 벅찬 감격이 눈 시리다. 썰매 끄는 리더견 안나를 끌어안았다.“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

첫 봉급으로 구입한 책, 잘난 것 없는 내 초심은 화석처럼 희미하다.

 

초임시절 사무용품 30Cm 대자 서로 빌려 쓰고, 16절지에 먹지 끼워 양식 그리던 사무실에 겨울이면 난방용 연탄을 피웠다. 적당한 시간을 놓쳐 불이 자주 꺼졌다. 추위 잘 타는 선배 왈“요즘 것들 나사가 빠져갖고 ...” 소걸음 무딘 몸짓으로 세월이 흘렀다. 그 때 요즘 것들이라 불리던 것들은 이제 내용연수가 다 되었다.

 

밤하늘 별자리 짚어주는 목동 같던 선배들 하나 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솔개 한 마리 잠시 하늘가에 머물다 날아간 정도의 시간인 듯 돌아보니 한 세대의 시절이 갔다. 내게는 쌓은 업적도 명리도 없다.

그저 세월만 훔친 좀도둑이었다는 생각이다.

 

퇴직 갈무리 도보

주문진 해변을 출발하여 멀리 엄지손가락만한 남애항 등대를 보고 간다. 동해안 작은 포구에는 해안선에 가난한 삶 걸쳐 놓고 외로운 생명줄 지탱하는 사람들이 산다. 동시대 이웃이 그늘처럼 살고 있다. 떠나려니 새롭게 보이는 게 많다. 오를 때 못 본 꽃 내려올 때 보인다는 말처럼 작은 하나 움켜잡고 귀한 것 잃은 줄 모르는 우매함이 느껴진다. 어둠 속에 닿은 낙산사. 백리길이다. 지친 다리 툇마루에 걸치고 한 그릇 국밥이 눈물겹다.

 

주말 하오의 관사는 고요하다. 낮은 산자락에 농가 서너 채 뻐꾸기 한가롭다. 이마에 손 얹으니 백두대간 선자령이 살며시 다가온다. 대관령 모시고 지난겨울 폭설 야간등산 사건 사과하고, 경포호수 불러 4.35Km 둘레길 이야기 나누며, 저물기 기다려 하늘에 영롱한 별 박아 놓고, 지난 가을 모아두었던 낙엽 꺼내 모닥불 피웠다. 세수 안한 초승달 뒤늦게 얼굴 내민다.

 

미련 다독이며 떠나는 길

주막집 외상은 갚아야 쓰것는디

행주치마 고쳐 매며 주모는 그냥 가라하네

막걸리 사발은 어찌 이리 무거운가?

 

내 인생의 중심이 들어있는 공직생활, 우리 조직에 감사드리고,

선배님과 동료 여러분들 -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관심 가지고 늘 들여다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

 

안도현 詩 한 편 나누며 물러갑니다.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

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

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

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

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

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2012년 6월 28일

 

강릉에서 ---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