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앞에서
문효치
해 어스름, 구름 뜨는 언덕에
너를 기다려 서겠노라.
잎 트는 산가(山家), 옹달샘 퍼내가는 바람아.
알록알록 색실 내어
앞산 바위나 친친 감고
댓가지 풀잎에 피리 부는 바람아.
꿈꾸는 이파리의 아우성을
하늘에 대어 불어놓고
보일 듯 말 듯 그림 그리어
강물에 풀어가는 색(色)바람아.
감기어라 바람아, 끝의 한 오라기까지와
기다리며 굳은 모가지에 휘감겨
네 부는 가락에 핏자죽을 쏟아 놓아라.
허물리는 살빛을
색(色)바람아 감고 돌아
네 빛 중(中) 진한 빛의
뜨는 달의 눈물을 그려봐라.
너를 기다려 어두움에 서겠노라.
어디선가 맴도는 색(色)바람의 울음아.
-서울신춘문예 당선작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젖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점에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해라
빛깔 없어 보이지 않고 표정이 없어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닿기만 해라
서동의 기쁨
두꺼운 구름을 떠밀고
나, 그대의 나라에 숨어들 때
선화여, 내 앞길에
하염없이 떠다니는 그대의 얼굴,
돌 같은 감자, 감자 같은 돌의 팔매질에
견고한 성벽도
물엿으로 녹아내리고
단내를 풍기며
나에게 걸어 나오시는 선화여.
전생의 질긴 인연이 옥빛으로 살아나
흘러들어오는 강물에
무수히 꽃피어 흐르는 그대의 얼굴.
그대의 알몸을 안고
내 마을로 들 때
감자밭은 황금의 동굴이 되고,
숲에서 바다에서
일제히 머리 들고 일어서는 빛,
풍장 치며 날으는 빛.
새롭게 열리는 하늘에서
땀을 닦느니.
武寧王의 金製冠飾
님은
불 속에 들어 앉아 계시다.
심지를 돋궈
三界를 골고루 밝히며
한 송이 영혼으로 타고 있는 純金.
百濟 匠人의 손톱자국이
살아서 꾸물꾸물 움직여
바로 내 앞을 지나며 다시 먼 먼
幽界의 나라에까지 이르노니
당신의 머리 위에 얹히어 타던 불,
천하를 압도하던 위엄어린 음성이
저 불꽃의
널름대는 혓바닥 갈피갈피에 스며있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반쯤은 미쳐 있는 나
이제 불길은
길 잃은 백성을 골라 비추시라.
찰랑찰랑
魔法의 방울 소리를 내며
人間의 마른 덤불에 댕겨붙는 불.
님이여,
당신은 이 불 속에 들어앉아 계시다.
남내리 엽서
-연당
우렁이란 놈
여름 내내 꽃대에 붙어
귀 기울이고 있다.
물속에 흩어져 흐르는
붉은 물감 모여 꽃으로 오르는 소리
우렁이는 귀 대고 듣고 있다.
연꽃 붉은 꽃잎 헤집고
내가 넣어 두었던
유년의 추억
알알이 연밥으로 익고 있다.
'시(詩)가 있는 마을 > 좋은 詩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엌은 우리들의 하늘/이정록 (0) | 2012.09.21 |
---|---|
계단에 놓아둔 편지 (0) | 2012.09.13 |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 (0) | 2012.07.18 |
흔들리며 피는 꽃/도종환 (0) | 2012.07.13 |
사람 꽃 / 박종용 (0) | 2012.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