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마을/좋은 詩 감상

부엌은 우리들의 하늘/이정록

파라은영 2012. 9. 21. 13:54

부엌은 우리들의 하늘

시인 : 이정록

낭송자 : 은희영

 

“어머니, 오늘은 부엌에 대하여 한 말씀만 해주세요.”

“너 시 쓸라고 그러지, 얘는 인자 쓸 것 되게 없나보네.”

“그러시지 말고 아무거나 얘기해주세요.”

“부엌은 잘 모르겠고, 너 낳았을 때 말이여, 배가 좀 고프겄냐,

그때는 식구도 많고 먹을 것도 변변찮아서 양을 많게 할라고

무도 썰어 넣고 고구마도 으깨서 밥을 풀 땐디, 먹어도 배가

허한 거여.“ “그래서요.”

“그래서 내 밥을 풀 때에는 시어머니 몰래 있는 힘을 다해서

밥을 눌러 펐는디. 지금도 상 차리다 그 생각이 나면 혼자서

웃는다야. 이건 할 이야기가 못 되는데 말이여, 밥을 그렇게

눌러서 퍼놨는디 네 삼촌들이나 딴 식구가 먹어버리면 워쩌겄냐,

나만 속상하고 낯 뜨겁지, 그래서 내 밥은 숭늉 들일 때 따로

갖고 들어갔는디, 그래도 나 혼자 속이 뜨거워서,

내 밥을 풀 때는 좀 모양이 안 좋게펐지 뭐냐. 주걱 자국을

그릇 가에 척 발라서 들어가면, 시어머니가 그러는 거여.

얘야, 너만 그렇게 몹쓸 밥을 먹어서 워쩐다냐 하고 말이여.

그때 내 가슴이 워쩌겄냐. 쿵당쿵당 세로

가로 달음질치고 달아오르고 그랬지.“

“......,”

“한번은 그러게 퍼 가지고 부엌문을 나서는디

왠 거지가 들이닥쳐서 그걸 반 떼어준 적도 있지 뭐냐,

근데 마음은 요상허게 편하드라. 이런 얘기도 시가 되냐?”

“시 쓰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냥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요.”

“웃기지 말어. 네가 쓰는 시라는 거 거짐

내 얘기 받아 적은 거라고,

먼 젓번에 왔던 글 쓴다는 네 선배가 그러드라.

너 그러니께 이 어미헌티 잘 혀.

글삯 받으면 어미한티도 한몫 떼주고 말이여.” .....

 

이정록의 산문 ‘시인의 서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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