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은 우리들의 하늘
시인 : 이정록
낭송자 : 은희영
“어머니, 오늘은 부엌에 대하여 한 말씀만 해주세요.”
“너 시 쓸라고 그러지, 얘는 인자 쓸 것 되게 없나보네.”
“그러시지 말고 아무거나 얘기해주세요.”
“부엌은 잘 모르겠고, 너 낳았을 때 말이여, 배가 좀 고프겄냐,
그때는 식구도 많고 먹을 것도 변변찮아서 양을 많게 할라고
무도 썰어 넣고 고구마도 으깨서 밥을 풀 땐디, 먹어도 배가
허한 거여.“ “그래서요.”
“그래서 내 밥을 풀 때에는 시어머니 몰래 있는 힘을 다해서
밥을 눌러 펐는디. 지금도 상 차리다 그 생각이 나면 혼자서
웃는다야. 이건 할 이야기가 못 되는데 말이여, 밥을 그렇게
눌러서 퍼놨는디 네 삼촌들이나 딴 식구가 먹어버리면 워쩌겄냐,
나만 속상하고 낯 뜨겁지, 그래서 내 밥은 숭늉 들일 때 따로
갖고 들어갔는디, 그래도 나 혼자 속이 뜨거워서,
내 밥을 풀 때는 좀 모양이 안 좋게펐지 뭐냐. 주걱 자국을
그릇 가에 척 발라서 들어가면, 시어머니가 그러는 거여.
얘야, 너만 그렇게 몹쓸 밥을 먹어서 워쩐다냐 하고 말이여.
그때 내 가슴이 워쩌겄냐. 쿵당쿵당 세로
가로 달음질치고 달아오르고 그랬지.“
“......,”
“한번은 그러게 퍼 가지고 부엌문을 나서는디
왠 거지가 들이닥쳐서 그걸 반 떼어준 적도 있지 뭐냐,
근데 마음은 요상허게 편하드라. 이런 얘기도 시가 되냐?”
“시 쓰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냥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요.”
“웃기지 말어. 네가 쓰는 시라는 거 거짐
내 얘기 받아 적은 거라고,
먼 젓번에 왔던 글 쓴다는 네 선배가 그러드라.
너 그러니께 이 어미헌티 잘 혀.
글삯 받으면 어미한티도 한몫 떼주고 말이여.” .....
이정록의 산문 ‘시인의 서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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