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마을/신문에서읽는詩

선운사에서..

파라은영 2016. 7. 8. 11:40
 

 

선운사에서 ― 최영미(1961∼ )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장마가 찾아오면 견뎌야 한다. 한참 걸릴 수도 있다. 계속 습한 날씨에

잔뜩 짜증 서린 그대에게, 오늘은 더 긴 괴로움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

가 견뎌내야 할 장마의 ‘한참’은, 이 시의 ‘한참’ 앞에서 참 소소하게 느

껴질지 모른다.  

지금 이 시인은 한참을 넘어 ‘영영 한참’ 동안 어떤 아픔을 견뎌야 한다.

사실 시인이 작품에 내세운 것은 아픔보다 꽃이다. 그것도 선운사의 꽃,

동백꽃이다. 실제로는 한겨울 말고 4월 초에 핀다지만 이름에 ‘동(冬)’자

가 들어가는 이 꽃은 분명 겨울꽃이다. 추위를 조롱하듯 진하게 피어나,

질 때는 목이 베어지듯 미련 없이 지는 탓에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이

 꽃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시인은 그냥 ‘꽃’이라고만 했지, 동백꽃이라고 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선운사에서’이니까 여기서의 꽃은 자동으로 동백꽃이

라고 읽힌다. 그런데 문제는 꽃이 아니라 나를 떠난 ‘그대’에게 있다. 꽃이

지듯 없어졌으면 싶은데,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은 도통 지질 않는다. 잘라

 버릴 수 없는 마음이 피어나 ‘영영 한참’ 사라지지 않는다니 이 이별의

고통은 속수무책이다. 참 난감한 일이다.  

이 난감함 앞에서 장마의 짜증은 사소한 일이 된다. 마음의 동백꽃이 지지

를 않는데 장마가 뭐 대수일까. 반대로, 내 님의 동백꽃이 만발한다면 날씨

가 뭐 큰일일까.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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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8.금요일 동아일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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