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마을/신문에서읽는詩

물결 표시/한정원

파라은영 2016. 3. 21. 14:49

물결 표시
- 한정원(1955~ )


 

기사 이미지
짧은 물결 표시 ~ 안에서

그가 긴 잠을 자고 있다

휘자(諱字) 옆에 새겨진 단단한 숫자

‘1933년 3월 18일~2010년 4월 22일’

웃고 명령하고 밥을 먹던 거대한 육체가

물결 표시 위에서 잠깐 출렁거린다

햇빛이고 그늘이고 모래 산이던,

흥남부두에서 눈발이었던,

국제시장에서 바다였던

그가 잠시 이곳을 다녀갔다고

뚜렷한 행간을 맞춰놓았다

언제부터 ~ 언제까지 푸르름이었다고

응축된 시간의 갈매기 날개가 꿈틀

비석 위에서 파도를 타고 있다

효모처럼 발효되는 물결 표시 안의 소년



사는 동안 사람은 얼마나 다양한 존재의 외투를 입는가. 흥남부두에서는

눈발이었고, 국제시장에서는 바다였던 그도 한때는 푸르고 푸른 생명이

었다. “웃고 명령하고 밥을 먹던 거대한 육체”가 이제는 물결 표시 안에서

 숫자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개체는 고유한 서사를 갖고

 있고, 그 서사는 다른 개체의 서사와 겹치면서 세계를 이룬다. 그 물결,

아직도 “출렁”이고 있는 것이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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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21.월.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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