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정체
시인 : 최준
오늘도 밝음보다 어둠이 넓은 오후다 정적은
멋대로 자라난 측백나무 울타리에 갈비뼈 사이를
용케도 헤집고 다니며
소란했던 과거로 고집스럽게 돌아가려는 추억인 그림자에
모난 주춧돌을 박아 놓는다
이끼들의 산란처인 뒷뜰에는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으면 좋겠다
지붕보다 좀 더 키가 컸으면 싶다 가끔이나마
뒷산을 내려와 뒤꼍으로 불어가는
바람의 안부라도 물을 수 있게
아, 하지만 너무 오래 입 닫고 있는 저 창문들은 어쩌나
아이의 울음마저 들리지 않는 밤
윗목 장롱과 그 앞에 버려둔 밥상의
빈 그릇들은 언제 치우나
마당 구석 꽃들은 남은 숨결을
시월이 마저 들어주길 바라며 미물소리로 잦아들고
통화불능의 전화기
점등되지 않는 전구들
서서히 기울어가는 지붕 위 하늘에 떠 있는
전생과 배고품은 모든 게 자취일 뿐
기억 속을 듬성하게 가로지른 거미줄일 뿐
아시겠는지 이제 나는
문 두드리다 문을 놔두고 돌아서는 빈집의 시간을
당신이라는 이름 부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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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의회 소식지제56호 201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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