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이야기/사회복지로가는 길

등불의 집 이야기

파라은영 2012. 5. 9. 10:19

 

날개 잃은 청소년들의 길을 밝히는 등불




"성태, 니 또 빤쓰만 입고 있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김진태 씨(51세)가 외친다.
“아니라예. 옷 입고 있심더.”
키득키득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성태(가명)라는 아이의 항의 섞인 목소리가 묻힌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위치한 2층의 아담한 붉은 벽돌집. ‘등불의 집’ 가족인 김진태 씨와 열세 명의 아이들은 두 달 전, 새 보금자리로 옮겼다. 솔직히 밤무대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김진태 씨의 수입으로 새로 건물을 세운다는 건 누가 봐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딱히 저축한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김진태 씨는 말한다. 집을 짓고자 했다면 결코 이뤄지지 않았을 거라고. 다만 20년 동안 한결같이 빌어온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가 ‘등불의 집’이라 이름 짓고, 이른바 ‘문제 청소년’이라 낙인찍힌 소년원 출신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건 27년 전인 1987년 3월. 당시 그는 건축학과에 다니는 대학생이었다.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집안 6남매의 막내였던 그는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고, 고등학생 시절 호기심에 배워두었던 기타로 밤무대 연주 아르바이트를 했다.
실력을 인정받은 김진태 씨는 학비와 용돈을 쓰고도 약간의 돈이 남았다. 남는 돈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던 그의 눈에 클럽에서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춤을 추고 있는 앳된 소녀의 지친 얼굴이 잡혔다. 그의 눈에 그 소녀는 ‘날개 찢긴 천사’로 비쳤고, 문득 그 소녀에게 날개를 새로 달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행보는 한 보육원에서 7년 동안 아이들에게 기타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의 상처와 맞닥뜨린 그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즉시 전문대 사회복지과에 입학해 이론을 습득하며 동아리 활동을 통해 소년원 정신 교육 강사로 활동했다.

소년원에서 그는 또 한 명의 아이를 만났다. 소년원 퇴원을 앞둔 그 아이가 김진태 씨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울먹거렸다. “진태 아재요, 저 좀 데려가 주이소. 지는 갈 데가 없심더.” 비록 아버지는 가출해 소식을 모르지만 어머니는 계신다 했다. 설득을 거듭해 아이를 어머니에게로 데리고 갔다. 시장에서 채소를 팔던 아이의 어머니는 2년 만에 만나는 아들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 아는 내 아가 아닙니더. 고마 그냥 데려가 주이소.”
그래도 그럴 순 없다고, 딱 하루만 아이를 데리고 자본 후에 그래도 안 되겠으면 전화를 달라 하고 되돌아 나왔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어머니도 아닌 그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소매치기 전력이 있는 그 아이는 계속해서 김진태 씨 부모님의 지갑을 훔쳤고, 끝내 부모님으로부터 함께 살지 못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생각지도 않게 독립을 해야 했던 그는 이곳저곳에서 돈을 융통해 집 근처 작은 아파트를 하나 얻어 아이와 둘이 살기 시작했다. 두 식구가 네 식구가 되고 다시 열 식구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졸업 후 건축회사에 입사한 그는 도저히 정상적인 회사 생활을 하면서는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몇 달 만에 사표를 쓰고 밤무대 악사로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을 시작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던가. 지금 김진태 씨의 가슴엔 몇 명의 아이가 묻혀 있다. 그 중 한 아이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마 나이가 열셋이었어예. 소년원에서 나가 또 소매치기를 하다 잡히 들어갔지예. 소년 분류 심사원에서 심판을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고마 양말이랑 수건으로 창틀에 지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었다 아입니꺼. 고작 열세 살에 말입니더. 그마가 유서랍시고 써 논 글을 보이 그저 눈물만 나데예.”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세상을 살 만한 놈이 못 된다. 하지만 나에게도 좋은 부모만 있었더라면, 이렇게 빨리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지금까지 돌봐 준 진태 삼촌에게 미안하다.”

그는 말한다. 아이들에게 날개를 빼앗은 건 우리 어른들이고 우리 사회라고.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아이들의 찢어진 날개를 꿰매주고 상처받은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거라고. 아이들은 등불의 집에 와서도 쉽게 정착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등불의 집을 거쳐 간 아이들은 모두 400여 명. 그 중 세 번 이상 가출하지 않은 아이가 없을 정도다. 아이들이 가출할 때마다 김진태 씨는 직접 차를 몰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헤맨다. 강원도로, 충청도로, 경상도와 전라도로, 그리고 제주도로.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단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여주는 데 음악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곧 기타와 오르간 등을 가르쳤다. 하지만 아이들이 쉽게 지쳤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을 보게 된 그는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저거다 싶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아이들은 기대 이상의 향상된 실력으로 보답했고, 전국의 보육원과 고아원, 양로원 등을 돌며 위문 공연을 펼쳤다. 그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사회에 빚 진 마음으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 등불의 집 맏형 격인 정요섭 군(21세)은 예고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아쟁을 전공으로 한다는 정 군 역시 8년 전, 소년원에서 나와 딱히 갈 곳이 없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졸업 후 경북대 국악과 진학을 목표로 아쟁을 켠다는 그가 수줍게 말한다.
“진태 삼촌을 만난 뒤로 제 인생이 180도 바뀌었어예. 어둔 터널에서 방황하던 절 이래 붙잡아 준 진태 삼촌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더.”


기사2

비행청소년들 보호 김 진 태 씨


‘어둠속 아이들’의 영원한 희망봉




밤무대 악사로 일하면서 비행청소년 보호시설인 「작은 등불의 집」을 운영해오고 있는 김진태씨. 그는 약20년 가까이 불우한 청소년들을 보듬고 살며 학교와 직장에 보내고 자립을 도와 온 작은 등불의 집 등대지기다.


김씨는 자원강사로 출강하는 보호관찰소· 소년원· 소년교도소의 청소년들 사이에 「진태 삼촌」로 통한다. 작은 등불의 집 아이들에게 그는 아버지이자 어머니이며 큰형이나 친구이 기도 하다.

요즘 작은 등불의 집 식구는 모두 13명. 그동안 2백여명의 청소년들이 거쳐갔다. 뭇사람들은 진태삼촌에게 묻는다. 혼자 살기도 힘든 세상, 비행 청소년들과 더불은 고단한 삶을 포기하 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그럴때 마다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속에 내 어린시절이 있다』 고.

부모사랑 한번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아이들, 세상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스스로를 포기 했던 아이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먹을 것과 돈을 훔치며 범죄의 나락으로 빠졌던 아이 들.

김씨는 이들 청소년과의 만남을 「운명적」인 것으로 단정한다. 검정고시를 거쳐 밤무대 악 사생활로 대학을 졸업하고, 마을 보육원이나 양로원 등지로 위문공연을 나갔던게 그의 인생 항로가 결정되는 서막이었다.

전문대 사회복지학과에 다시 입학하고, 자원봉사자로 갱생보호공단· 소년원 등에 강의를 나갔다가 작은 등불의 집 식구가 될 아이들을 만났던 것. 『상처받은 가슴을 쓸어 안아줄 따뜻한 사랑이 무엇보다 절실했어요. 설움많은 아이들을 더이상 어두운 뒷골목으로 내몰지 않기위한 마지막 울타리가 필요했습니다』

지난 87년 5월 소년원에서 나온 아이들 5명을 데리고 김씨가 처음 작은 등불 의 집을 마련 한 곳은 달서구 성당동의 어느 셋방이었다. 그후 10년간 많은 식구를 이끌고 남의 집을 전 전하며 고생도 많았다.

주위의 손가락질과 수근거림 속에 외출도 맘대로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온 아픈 세월이었다. 내집 마련을 위해 술· 담배부터 끊고, 밤에는 음악을 연주하며 낮에는 악기 세일즈에 나서 기도 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모자라는 잠을 채우고, 라면이나 김밥 한줄로 점심을 떼우기 가 다반사였다.

그러다 신한국인으로 선정되었던 3년전 주위의 도움으로 달서구 상인동에 작은 등불의 집 건물을 하나 지었다. 『욕심을 너무 앞세웠던 탓인지 많은 빚을 지고 말았어요. 차리리 전세 를 얻어 나가고 싶지만, 이젠 그마저 쉽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밤늦게 돌아와도 김씨는 아침 5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도시락 7~8개를 싸고 아침상을 차려 아이들을 내보내고 나면, 낮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이 또 태산이다. 아이들 문 제로 가봐야 할 데도 한두군데가 아니다.

김씨는 상인동 집으로 들어가면서 아이들의 정서안정과 성취감 부여를 위해 사물놀이를 가 르쳤다. 북· 장구 치기가 싫어 가출까지 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피눈물 나는 연습을 했다. 그래서 탄생된게 작은 등불의 집 사물놀이패인 「등불패」. 사물놀이 경연대회에서 입상을 하고 부터는 유명세까지 타서 곳곳에서 공연요청이 들어오고 아이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고.

그는 최근 책을 하나 냈다. 작은 등불의 집을 지키며 겪어온 파란곡절과 애환을 담은 실천 에세이 「진태 삼촌의 열두 손가락」 (성하출판)이란 책이다. 3백여쪽에 달하는 책속에는 방 황하는 10대들에게 띄우는 가슴 뭉클한 사연과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작은 등불의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남아 있고 내 열두 손가락이 제구실을 하는 한, 음악을 연주하며 아이들과 나눌 소박한 삶과 꿈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작은 등불의 집(053-642~6090).

[출처] 등불의 집|작성자 맑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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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교수님은 대구미래대학을 졸업하고  교수가 되어 문제론 아동복지론을 가르쳐 준 나의 은사님이시면서  사회복지과 동창회장이기도 하다. 2010. 2011.대구미래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김진태교수님의 따뜻한 관심으로  행복하게 공부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2012년 졸업한 서산사람 은희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