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마을/신문에서읽는詩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파라은영 2016. 3. 31. 11:27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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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산수유가 지리산 산동마을을 노랗게 덮더니, 화엄사에 홍매화가 검붉게 지더니, 이제 하동 쌍계사 골짜기에 벚꽃이 분분(紛紛)하다. 산은 유구한데, 저 산에 쌓인 상처는 여전하다. 근대사의 한 고비가 여기에 축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가수 안치환이 노래로 부르면서 더 유명해졌다.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고 시인은 말하였으나, 이번 주말엔 시인을 만나러 저 산에 가야겠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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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31.목.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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