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의 옛 기억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이 살아나도록 부추긴다. 내가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도 옛사람의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서 그 기억을 건드려 옛사람이 살아있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억은 진리가 아니다. 감정 역시 진리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다. 그러므로 나의 기억이나 감정이 아닌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승리한다. 사단은 원래 속이는 자이다. 아담과 하와를 속였고, 예수님을 유혹했으며 지금도 우리를 기억이나 감정으로 속이고 있다. 지금부터 선포해야 한다. ‘날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임을!
에베소서에 보면 주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신부라고 표현하셨다. 신랑 되시는 주님을 맞이할 영광스러운 신부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누려야 할 신분이다. 우리는 땅속에서 기는 애벌레가 아니다. 예수님 믿고 거듭나는 순간 아름다운 호랑나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변하지 않아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풍성하심을 누리지 못하고 땅에 아름다운 날개를 짓이기면서 더러운 땅을 애벌레처럼 기며 살아가는 사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본다.
이것이 바로 율법적 영성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으로 살아가는 것, 다름 아닌 행위 패러다임이다. 행위로 살고자 하며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삶은 결코 만족이 없으며 그것이 율법적인 영성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율법적인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은 비전을 발견하면 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마르다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를 개선한다는 것은 진정한 답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은혜의 영성 안에 사는 사람은 내 신랑 되시는 주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므로 생명을 다하더라도 기쁘고 즐거우며 감사한다. 사도바울이 바로 그러한 분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삶을 살았기에 그의 고백처럼 생명을 다해서 달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은혜의 영성위에 비전과 성령의 은혜가 넘쳐날 때에 우리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비전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승부는 변화된 신분을 누리는데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닌 건강한 교회를 이루는 건강한 영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