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마을/좋은 詩 감상

고향/ 박두규

파라은영 2006. 11. 7. 13:09
15 고향/박두규    

고   향


이십일 세기에 들어 고향은 스스로 나를 떠났다. 
나숭개나 씀바구 그 흐드러진 봄나물은 그대로 두고 
제 살아온 세월만 데리고 떠났다. 
더 이상 영혼이 짓밟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겠지. 
그렇게 고향은 가고 
나는 홀로 남아 스스로 고향이 되었다. 
마흔여섯 살 먹은 어린 고향이 되어 
나는 나대로 갈 곳이 없었다. 
바람찬 날의 팽나무 이파리로 흩어질 수도 
봇도랑 참붕어로 누군가에게 잡혀 올려질 수도 
동산에 올라 친구를 부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빈 껍데기의 고향이라도 
그리움의 퇴적층이라도 되어 남아 있는 한 
고향은 돌아올 것을 믿는다. 
가뭇없이 사라진 마음을 헤집고 
참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발이 되어 
차곡차곡 지난 세월을 돌려놓을 것이다. 

 -박두규(1956∼)시. 계간『시와 사람』2002년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