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마을/신문에서읽는詩

철거

파라은영 2015. 6. 3. 09:44

 

철거

  시인 : 김록(1968~)

 

24톤의 집이 무너졌다

지은 집이 폐기물이 되는데 33년이나 걸렸다

무너진 곳을 가보니

인부가 감나무터에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오래된 뿌리에 무엇을 들이대며

거름도 되지 못할 그 같은 짓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성(誠), 인(仁), 인(忍)을 욕되게 하고

남의 집을 허물면서

한 집안의 금붙이 동붙이를 팔아 먹고

이웃집에 주기로 마음먹은 화분과 장독까지 깨부셨다

철거 전 영산홍을 파내어 화분에 옮겨 심고

장독들은 깨끗이 닦아 놓았는데

기나긴 세월 무엇을 참고 있었기에

이같이 하찮게 무너질

어진 마음을 모셔 두고 있었을까

집하장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걸릴까

정든 것에 일일이 경의를 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불도저는

한 집안의 위엄을 뭉갤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러나 저러나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다 버리기 위해 또 살아가는 것이다

그 동터에 다다르면

기중기는 허공의 뼛가루만 들어 옮기고 있을 것이다

이미 무너진 집을 또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터에서

가훈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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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6.3수 동아일보 황인숙의 행복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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