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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쿠텐베르크의 발명

파라은영 2014. 10. 27. 17:16

 

2010년 9월 인쇄 역사의 지축을 뒤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현존하는 금속활자의 최고본인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이상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증도가자' 12점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증도가자'는 1239년 간행된 목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보물

758호)의 인쇄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해 붙여진 이름이다. (증도가)

말미에 "원본은 금속활자로 편찬됐지만 전해지지 않아 목판으로 복각해

 찍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1239년 이전에 주조된 활자라는 게 근거다.

 이 때문에 세계 인쇄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성수 청주대 문헌 정보학과 교수는 2012년 2월 8일 학술발표회에서

증도가자가 1234년 (고금상정예문), 1241년 (동국이상국집)등 고려시대

주요 문헌들을 인쇄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출토지와 연대 검증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증도가자'가 또 한 번 전

세계 역사 교과서를 바꿔놓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직지심체요절)은 세계가 인정한 가장 오래된 현존 금속활자본이다.

1377년(고려 우왕3년) 7월에 찍어낸 직지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이

갖고 있던 '세계 최초' 타이틀을 빼앗았다. 직지는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본

보다 78년 이상 앞선다. 이 사실은 프랑스 국립 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1929~2011)가 동양문헌실에 묻혀 있던 것을

찾아내면서 밝혀졌다. 이 때문에 박병선 박사는 '직지대모'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가 직지를 처음 접한 것은 1967년이었으나 고증을 거쳐 1972년에

세계 공인의 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직지는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정식 등록됐다. 상,하 2권으로 돼 있는데, 현재 하권만

 전해지고 있다. 안타깝게 그것마저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구한말 프랑스 사람들이 훔쳐갔기 때문이다.

직지를 제작한 곳은 충북 청주에 있는 흥덕사라는 절인데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인쇄술은 화약, 나침반, 종이와 함께 인류 발전을 이끈 4대 발명품 중 하나다.

지난 밀레니엄의 최대 사건은 '금속활자 발명'이었다.

 

미국의 월간지 <라이프>는 1997년 19월 특집호에서 지난 '1000년'을 만들어낸

100대 사건을 선정해 지난 밀레니엄을 회고했다. <라이프>는 예수 탄생 이후

두 번째 '1000년'의 최대 사건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경을 인쇄한 일

이라고 발표했다. 1999년 말 <타임스>,<월스트리트저널>,<워싱턴포스트>,

BBC등 유력 언론들도 지난 1000년간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발명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꼽았다.구텐베르크의 활자는 지식·정보의 혁명적

 대량생산과 확산을 가져온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다.

특권층과 성지작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일반 대중으로까지 확산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인쇄술의 보급은 16세기 종교개혁, 18세기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실제로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시민혁명의 바탕에 금속활자와

인쇄술이 자리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구텐베르크 이후를 '지식의 시대'

라고도 부른다. 인쇄술의 확립에 대해서는 수많은 주장이 있지만 구텐베르크의

 지위는 확고하다.위대한 인쇄술의 창시자 요하네스 수텐베르크(1397~1468).

 그의 업적 중 단연 최고의 걸작품은 1450년경에 착수한 《42행 성경》(구텐베르크

 성경)이다. 전 2권 총 128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작품을 위해 290개나

 되는 기호들이 만들어졌다. 페이지마다 2600개의 활자가 들어 있고, 2단으로

 구성돼 있다. 각 단이 42줄로 돼있어 '42행 성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300만 개의 주조활자들을 사용해 인쇄했다. 총 180부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30부는 양피지본이고, 나머지는 종이본이라고 한다. 그중 48부가 남아 있다.

그마나 상태가 좋은 것은 20여 부에 불과하다.

디자인이 뛰어난 걸작이란 점과 인류문화사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는 상징성을

갖춘 덕분에 고서 수집가들이 가장 탐내는 대상이다.

그런데 정작 구텐베르크는 그의 발명품으로 경제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455년 <42행 성경>을 찍어내고서는 곧바로 파산했다.

결국 5년 동안 유지하던 인쇄소를 출자자인 요한 푸스트에게 빚 대신에 넘겨야 했다.

푸스트는 인쇄소를 양자인 페터 쇠퍼와 함께 계속 운영했다.

1460년 이후 구텐베르크의 불행은 더해만 갔다.

결국 장님이 돼 인쇄업을 그만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465년 고향 마인츠 대주교의 도움으로 연금을 받아 생활하다가

1468년 2월 3일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과연 구텐베르크는 최초의 인쇄술 발명자일까? 그렇지는 않다.

어떤 발명도 결코 홀로 완성할 수 없다. 인쇄에서도 마찬가지다.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을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이 아니다. 그전에도 인쇄가 있었다.

구텐베르크에 앞서 중국인들이 이동식 활자와 다른 인쇄 기술들을 발명했다.

목판인쇄술은 구텐베르크보다 수 세기나 앞서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구텐베르크보다 600여 년 앞선 9세기경 중국 사람들은 판목에 활자를 하나하나

 새겨서 그 활자를 가지고 인쇄를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구텐베르크는 이동이 가능한 활자의 개념을 최초로 생각해낸 인물도 아니었다.

중국은 이미 11세기에 활자를 알고 있었다.

가동식 활자는 11세기 송나라의 필승이라는 사람이 발명했다.

파피루스나 벨럼(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에 글을 썼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과는 달리 중국인은 기원전 100년경부터 이미 종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파피루스와 벨럼은 둘 다 인쇄용으로 부적합했다.

파피루스는 부서지기 쉬웠고 벨럼은 너무 비쌌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인쇄술의 발명이 아니라 그 기술을 완벽하게 구현한 데에 있다.

인쇄를 위한 모든 요소를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에 짜넣은 것이 그의 최대 업적이다.

굳이 최초라고 하면 활자 기법을 적용해 인쇄 시스템을 고안한 점이다.

그는 책을 대량생산할 수 있도록 전체 생산 과정을 개발해냈다.

오늘날 서양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도 구텐베르크의 주자발명과 함께

 대량 인쇄를 가능케 한 인쇄기 발명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인쇄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소중한 은총의 선물이다."(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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