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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황동규 시인님 강의 내용 참고 <문학의 진실과 아픔(초록)>

파라은영 2009. 9. 27. 18:59

문학의 진실과 아픔 (초록)

 

첨부파일 황동규 시인 강의 내용.hwp

 

 

 

 

 

 

                                                    황 동 규

 

 

구도나루 포구

―시인 오정국, 박주택, 박만진과 함께

 

 

별 내용 들어 있지 않은 민짜 여행시를 하나 쓰자.

잘난 경치도 없고

타곳에서 불현듯 돋을새김되는 삶의 요철 쓸어보고

그동안 뭘 살았지? 하며 맥 놓고 버스에 오르거나

숨 막히는 경관에 마음 쩌릿쩌릿하지 않고

보통 풍경과 그저 한때 같이 보낸 시.

 

2008년 5월 중순 어느 오후 서산시 서쪽,

팔봉산을 등 뒤에 부려놓고 나앉은 구도나루,

가로림만이 눈앞에 호수처럼 떠 있고

건너편 언덕들이 담채(淡彩) 그림자를 물 위에 드리우고

배들이 충청남도 말씨처럼 천천히 들락날락하는,

그렇다고 예찬(倪瓚)*의 속도 줄인 물 그림이 풍기는

쓸쓸한 고요도 없는,

별 볼일 없이 편안한 곳.

 

며칠 동안 철모르고 서해안에 몰려든 광어 떼

식당 속까지 헤엄쳐 들어와

시인 넷이 5만 8천 원에 소주 한잔 곁들여

회와 매운탕을 띠 풀고 먹은 곳.

 

일하는 후배들 먼저 가고 혼자 남아

포구의 저녁과 버스 막차 시간이 남아

갈매기 불규칙하게 나르는 조그만 부두를 거닌다.

하늘 한가운데로 점점 높이 솟던 봉우리 구름 꺼지고

기다렸다는 듯 저녁별 하나 건너편 하늘에 돋는다.

잔잔한 바다가 들판처럼 어두워진다.

제 느낌을 타려다 타려다 채 못 타는

외로움 이전의 날 외로움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은 곳.

 

* 중국 원(元)시대 화가. 그의 호 운림(雲林)은 허소치의 화실 이름을 ‘운림산방’으로 만들었다.

 

 

I

문학은 죽었다 라는 말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왜 문학이 전 시대보다도 필요한가? 문학은 죽었다라고 하는데 왜 시집과 소설책은 해마다 더 많이 나오는가? 왜 이즈음 미국 Harvard대학이나 Johns Hopkins 대학 의학부에서 정식으로 문학 강의를 시작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연세대 의대를 비롯한 몇 의대에서 문학 강좌를 넣거나 넣으려고 하는가? 그리고 미국 대학에서 일고 있는 문학과 과학의 융합론은 그 근거가 어디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하다보면, 문학 속에는 우리가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고, 또 의사나 과학자들까지도 꼭 알고 살아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그 무엇의 일부나마 여러분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그 무엇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문학이라고 생각해온 것을 검토하려는 것,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문학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올바른 문학의 이해를 위해 바람직학 것인가를 검토하려는 것입니다. 그 검토는 늘 하는 식과는 다르게, ‘문학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문학은 무엇이 아닌가’로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늘 생각해온 문학, 즉 무엇인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감동적으로 쓴 글이 아니라, 문학은 삶의 진실 때문에 쓰기 싫어도 쓰게 된 글이라는 것, 독자 편으로 보면 삶을 제대로 보려면 읽기 싫어도 읽어야 할 글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합니다.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사회학은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학문들입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지배적입니다. 하기는 산업혁명 이후부터 그들은 거의 항상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해 왔습니다. 때로 우리나라의 1970년-80년대처럼 두 지배 이데올로기가 공존하는 경우에는, 나뉘어 봉사했습니다.

예를 들면, 19세기 미국의 ‘미국의 꿈 (American Dream)’은 말이 ‘꿈’이지 사실은 인디언 학살을 통한 서부개척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같은 몽골로이드인 아메리컨 인디언들을, 콜럼버스 발견 당시 현재 미국 지역에 살고 있던 700만을 현재 30만으로 줄인 대학살이었습니다. 그 30만마저 지금은 보호지역에서 술과 마약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 정치 경제 학자들은 쌍수를 들어 ‘미국의 꿈’ 옹호했던 것입니다. 학자들이 회의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19세기 미국 문학가 가운데, 아니 적어도 우리가 이름을 아는 19세기 미국 문학가 가운데, ‘미국의 꿈’을 찬양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마크 트웨인, 허만 멜빌 같은 대가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그 어떤 작가도 ‘미국의 꿈’ 뒤에 있는 삶의 진실을 파악했고 따라서 찬양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학은 원래 구체적인 삶의 진실을 다루기 때문에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눈감고 봉사하거나 추상적인 이념의 진실을 자기 것으로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진실을 따르다 보면 이념의 진실이 아닌 삶의 진실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사회학보다 문학이 윤리적 우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예를 또 하나 들어보면, 흑인 노예 문제가 있습니다. 19세기 초반 미국 남부인들은 거의 다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마크 트웨인, 스토우 부인을 비롯한 우리가 이름을 아는 남부작가들 가운데 노예제도를 찬양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격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예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이상 달리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방향의 글을 쓰려고 해도 삶의 진실이 숨은 목소리가 되어 펜을 쥔 손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II

이제 삶의 진실이 문학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억압을 받을 때, 어떻게 숨은 목소리가 되어 작가의 의도를 바꾸는 가를 몇 개의 예를 들어 검토해보겠습니다.

예 1. Shakespeare. 셰익스피어 자신은 전형적인 르네상스 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인간이 주어진 운명과 싸우다가 인간답게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내용은 중세의 덕을 지닌 인간들이 르네상스적인 간교한 인간들에 의해 파괴당하는 것을 그렸습니다. 그게 그 당시 삶의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Othello, King Lear, Macbeth, Hamlet, 셰익스피어가 자신이 속해 있는 르네상스 인들의 편을 들고 싶어도 삶의 진실이 그러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예 2.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이 소설을 쓸 때는 이미 독실한 러시아 정교 신봉자가 된 도스토예프스키가 당시 지식인 사이에 풍미하던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 특히 주인공 Stavrogin류의 허무주의를 비판하려 했습니다. 그 비판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후기에 지녔던 이념과 정확히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무주의자들의 삶을 파헤치다가 그들의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어느 주인공보다도 더 매력 있고 깊이 있게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스타브로긴의 세 분신 Kirilov, Shatov, Verhovensky

 

이제 삶의 진실이 시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쓰게 만든 경우를 내 초기 시 하나를 읽으며 살펴보겠습니다.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III

 

 

인간에게는 어떤 형태건 간에 ‘아픔’이 있습니다. 고아로 태어났다던가, 불구자로 태어났다던가, 움치고 뛸 수 없을 만큼 가난하게 산다던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던가, 산업재해를 입었다던가, 사업에 실패했다던가, 가지가지의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픔은 또 어떻습니까?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정생활이 엮어지지 않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사람, 있으면 어디 손들어 보십시오.

암으로 고통을 받거나 별세한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암이 아니더라도 아픈 병은 좀 많습니까? 늙는 아픔은 또 어떻습니까? 그러나 그런 아픔들에 앞서 인간은 그 무엇소다도 욕망의 존재이고 욕망의 실체는 무한하기 때문에 생태적으로 아프도록 태어난 존재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네 개의 성스러운 진리인 四성제 가운데 첫 번인 ‘苦제’ 라고 합니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성스러운 진리인 것입니다. 그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이 해탈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사실 말이 해탈이지 해탈은 좀 힘든 겁니까? 무엇만 되었으면 하고 바라다가 무엇이 되고나면 더 나은 것을 바라게 되지 않습니까? 무엇을 얻었으면 하고 노력하다 정작 얻으면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그 무한한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실패에 좌절하든, 실패하지 않고 욕망의 고리에 매달려 있든, 인간에겐 아픔이 있습니다. 아픔이란 인간의 삶 속에 미리 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아픔을 어떻게 할까요? 아픔을 극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물론 세상을 버리고 수도자가 되는 길도 있겠으나 우리는 세상 속에 사는 존재들입니다. 나는 그 아픔의 나음 속에서, 아픔의 극복 속에서, 삶의 맛을 발견하려 했고, 그 살맛을 아는 인간 사이의 공감을 발견하려 했습니다. 아픔의 극복이야 말로 인간의 기품을 보여주는 표지가 아니겠습니까.

훨씬 전부터도 인간의 아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직접적으로 아픔과 1대1로 막다드린 것은 지금부터 12년 반 전인 1997년 1월 진주종 수술 때부터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으리 만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수술이었습니다. 그 수술 후유증으로 나는 아픔에 대해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시적 접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퇴원 날 저녁

 

흑반(黑斑) 잔뜩 끼어 죽어가는 난 잎 어루만지며

베란다 밖을 살핀다.

저녁 비가 눈으로 바뀌고 있다.

주차장에 누군가 차 미등 켜논 채 들어갔나,

오른쪽 등 껍질이 깨졌는지

두 등 색이 다르다.

안경을 한번 벗었다 다시 낀다.

눈발이 한번 가렸다가

다시 빨갛고 허연 등을 켜놓는다.

난 잎을 어루만지며 주인이 나오기 전에

배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

다시 만날 때까지는

온기를 잃지 말라고

다시 만날 때까지는

눈감지 말라고

치운 세상에 간신히 켜든 불씨를

아주 끄지 말라고

이 세상에 함께 살아 있는 그 무엇의.

 

난이 점차 뜨거워진다.

 

 

그 아픔 이후 아픔과 아픔의 극복을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종교나 철학적인 차원의 해결이 아니라, 아픔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시키는 예술의 장에서 만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셰익스피어의 비극,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작, 엘리엇의 후기시, 그리고 규모야 어떻든 내 후기시의 한 특징이라고 생각한 것은 지금부터 오륙 년 전 부터입니다. 다시 말해 아픔을 통해 인간을 새로 깊이 만나고 사물을 새로 깊이 보며, 또 그 아픔의 나음을 통해 삶의 맛을 보는 상황을 노래하는 작품을 그때부터 의식을 갖고 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받은 김달진문학상 수상소감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일단 가르치는 일을 끝내자 기다리던 자유와 함께 있는 줄도 모르던 병들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으로 온 것은 비문증, 다음에 온 대상포진이라는 괴상한 병은 처음에 섣불리 다른 병으로 짐작하고 치료를 등한히 하는 바람에 지독하게 앓았고, 감기도 두어 차례 전에 없이 혹독하게 치렀습니다. 이번 시집을 내려고 준비하는 동안에는 족저근막염이라는 우리말 큰 사전에도 오르지 않은 발병이 시작되어 석 달 며칠이 지난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상태는 많이 좋아졌으나 완전히는 낫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집의 많은 작품들이 인간이 병을 이겨내는 고통과 환희에 관한 것들입니다. 무병(無病)보다는 앓다가 낫는 맛이 삶의 맛이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인간을 그 무엇보다도 앓을 수 있는 존재로 보기 시작한 것도 이 시집입니다. 표제작 ‘겨울밤 0시 5분’이 전형적인 예일 것입니다. 겨울밤 마을버스 종점에서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간절히 막차를 기다리는 여자야 말로 앓고 있는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늙음도 앓음의 한 가지겠지요. 늙음을 뚫고 솟는 환희 또한 아픔을 뚫고 솟는 환희처럼 가슴 흔드는 환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아픔과 그 나음 속에서 기쁨 혹은 깨달음을 맞는 시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삶의 맛

 

 

환절기, 사방 꽉 막힌 감기!

꼬박 보름 동안 잿빛 공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살다가,

체온 38도 5분 언저리에서 식욕을 잃고

며칠 내 한밤중에 깨어 기침하고 콧물 흘리며

소리 없이 눈물샘 쥐어짜듯 눈물 흠뻑 쏟다가,

오늘 아침 문득

허파꽈리 속으로 스며드는 환한 봄 기척.

 

이젠 휘젓고 다닐 손바람도 없고

성긴 꽃다발 덮어주는 안개꽃 같은 모발도 없지만

오랜만에 나온 산책길, 개나리 노랗게 울타리 이루고

어디선가 생강나무 음성이 들리는 듯

땅 위엔 제비꽃 솜나물꽃이 심심찮게 피어 있다.

좀 늦게 핀 매화 향기가 너무 좋아 그만

발을 헛디딘다.

신열 가신 자리에 확 지펴지는 공복감, 이 환한 살아있음!

봄에서 꽃을 찾을까, 징하게들 핀 꽃에서

봄을 뒤집어쓰지.

광폭(廣幅)으로 걷는다.

몇 발자국 앞서 뛰는 까치도 광폭으로 뛴다.

이 세상 뜰 때

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

무병(無病)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

앓지 않고 낫는 병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

 

 

겨울밤 0시 5분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터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마을버스 종점, 미니 광장 삼각형 한 변에

얼마 전까지 창밖에 가위와 칼들을

바로크 음악처럼 주렁주렁 달아놓던 철물점이 헐리고

농산물센터 ‘밭으로 가자’가 들어섰다.

건물의 불 꺼지고 외등이 간판을 읽어준다.

건너편 변에서는 ‘신라명과’가 막 문을 닫고 있다.

 

나머지 한 변이 시작되는 곳에

막차로 오는 딸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듯

흘끔흘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

키 크고 허리 약간 굽은,

들릴까말까 한 소리로 무엇인가 외우고 있다.

그 옆에 아는 사이인 듯 서서

두 손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리 가볍게 치다 만 것 같은 하늘에 저건 북두칠성,

저건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아 오리온,

다 낱별들로 뜯겨지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여자가 들릴까 말까 그러나 단호하게

‘이제 그만 죽어버릴 거야,’ 한다.

가로등이 슬쩍 비춰주는 파리한 얼굴,

살기(殺氣) 묻어 있지 않아 적이 마음 놓인다.

나도 속으로 ‘오기만 와봐라!’를 몇 번 반복한다.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발 없이 걷듯

 

 

걸음 뗄 때마다

오른편 발뒤꿈치가 땅기고 아픈 족저근막염에 걸려

아홉 번 침을 맞아도 통증 기울지 않고

복수초가 피었다 졌을

지금쯤 개나리 한창일

산책을 두 달 여 못 나가고

지난 주말엔 친구들이 부르는 술자리에도 못 낀 채

미술책이나 들척이다가 떠오른 것이

4년 전인가 터키 에베소에서 다리 절면서

‘원 달러, 윈 달러!’ 외치며 사진첩 팔던 사내,

물러갈 때 심하게 다리 절름댔으나

사람들 앞에선 알아챌 만큼만 가늘게 절던 사내,

그의 얼굴이 어둡지는 않았어.

 

몇 시간 전 거리에선 사람들 날듯이 걸어 다니고

그들의 삶이 내 삶보다 더 싱싱하고

이 세상이 내 알고 있는 세상보다 더

눌렸다 튀려는 용수철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틈 시간 내어 힘들게 내려간

사당역 부근 지하서점 ‘반디 앤 루니즈’에선

닷새 전 나온 내 시집 어떻게 꽂혀 있나 살피려다 말고

듬직한 미술 책을 하나 들고 난간 잡으며 기어 올라왔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젊은 남녀가 수화(手話)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턱 높이까지 올린 한 손 두 손 쉬지 않고 움직이고

여자는 두 손 마주 잡고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발길 옮기려다, 아 여자 눈에 불빛이 담겨 있구나!

여자가 울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기쁜 표정 담긴 얼굴이

손 없이 수화하듯 울고 있었다.

나는 절름을 잊고 그들을 지나쳤어.

IV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몇 마디로 줄이자면, 인간에게, 특히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적이고 이기적이 되어가는 21세기 현대인에게, 문학은 없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기둥의 하나입니다. 자기 자신이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의 진실의 자리에서 인간을 볼 때, 삶의 가장 ‘인간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픔’입니다. 그냥 병이 없는 것 보다는 병을 앓고 낫는 곳에서 인간의 맛을 보는 일, 그냥 병이 없는 무병의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이다, 라는 말로 이 강연을 끝내겠습니다.

출처 : 마삼말쌈 시낭송회
글쓴이 : 김명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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