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마을/좋은 詩 감상

문태준의시(詩) 그맘때에는 외시몇편

파라은영 2006. 10. 16. 16:34
문태준



1970년 김천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가 있음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음


---------------------------------------------------



그맘때에는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 보았다

빈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 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 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 앉던 그들은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 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극빈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 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 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빈집의 약속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메달아 두듯 마음에 봄 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년 혹은 백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숲이 들어 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꾸어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 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