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생각하며 ...
누군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4월은 생명의 계절, 아름다운 꽃의 계절 아닌가. 매년 봄이 되면 느끼고 감격해 하는 것은 생명력의 위대함이다. 겨우내 얼었던 그 땅, 마른 땅속에서 뚫고 올라오는 생명의 섭리 그 새싹들의 힘, 죽은 것 같고 깡마른 고목 같은 나뭇가지에서 곱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오름을 바라보면서 자연의 신비함,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기독인들의 4월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절기이기 때문에 또 다른 생각에 깊이 잠기게 된다. 4월이 되면 목회자들과 또는 교회들에서 고난주간 및 고난주일에 한번쯤 묵상하고 말씀을 준비하여 성도들과 함께 나누지 않을까 싶고, 사순절 및 고난주간에는 특별한 목회 계획을 세우지 않겠나 말씀 묵상의 시간과 기도의 시간을 갖는 중에 이사야서를 살피게 되는 말씀이 사 53:4-6을 빼놓을 수 없는 말씀이리라 생각 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개역개정 사 53:5)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처 주었구나”(공동번역 사 53:5). 선지자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같은 말씀인데 ‘개역개정판’과 ‘공동번역판’의 차이점을 볼 인류의 구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며
한국은 교회들끼리, 목사들끼리, 신자들끼리, 서로 물고 뜯는다. ‘기독교’와 ‘예수교’, ‘합동’과 ‘통합’ 뭐가 다른가? ‘웨슬리’와 ‘칼빈’의 차이점은 그렇다 치자. 그럼 그들의 삶은 뭐가 얼마나 다른가. 성결을 강조하는 성결교회 교인과 예정을 말하는 장로교회 교인과의 차이점은 뭐가 다른가? 성결이든 예정이든 중생의 체험은 있는지가 궁금하다. 있다면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말은 듣고 행동은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되새겨 본다. 나는 바리새인은 아닌가? 스스로에게 묻자. 그러면서 요한계시록 서두에 나온 말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는 말씀을 따라 살 수 없을까?
말만 잘하는 예수쟁이는 되지 말자.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영국의 유명한 왓츠(1674-1784) 목사가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그려낸 찬송 “만왕의 왕 내 주께서”를 음미해본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주 십자가에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일 힘쓰리.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기쁨 영원하도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다 함은 예수의 고난의 흔적이 온 몸에 있어야 하리라.
예수 가신 그 길, 골고다의 언덕 길, 십자가의 죽음의 길까지를 함께 가야 하리라.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 부활의 새 아침을 기다리는가? 죽음의 십자가 피하지 말라.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갖추었는가.
부활 주일을 준비하는 우리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율법에 의하면 죽을 수밖에 없어 떨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말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를 마음에 새긴다. |
2019.04.09.화요일 성결신문 社說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