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은영 2016. 9. 19. 17:42

사랑의 노래/김기택

 

연못 앞에 앉아 편지 봉투 뜯으니
그대 키운 연못 고기들이
갑자기 반기며 뛰노는구나.
물 면에 떠올라 입 뻥긋대며
눈웃음짓는 놈도 있구나.
우리가 방생교(放生橋)로 이름붙인 무지개다리가
거꾸로 비쳐
하늘 속에 둥근 문이 열린 것 같다.
편지 속에서 귀 익은 발자국 소리 들리고
그대 모습 나타난다.
사라지기 전 그 모습 잡으려 손가락 세우고 공중에서 떠는
열 개의 지문(指紋).

- 황동규(1938~ )

[경향시선]‘사랑노래’

편지에는 펜으로 글을 쓴 사람의 마음과 표정이 글자 하나하나에

비쳐 보이는 것 같다. 행간에는 여러 번 망설인 흔적이 보인다. 마

침표에는 다음 문장을 어서 잇고 싶어 하는 펜의 움직임이 느껴진

다. 힘껏 눌러쓴 글자에는 감정의 활발한 맥박이 보인다. 성급하게

달려오려는 몸과 마음의 뜀박질과 거친 호흡을 달래서 글자에 겨우

집어넣은 힘의 절제가 느껴진다. 어서 글자에서 해방되어 목소리로

표정으로 심장의 박동으로 읽는 이에게 들어오려는 조급한 마음이 느

껴진다. 그 글은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 변화하고 부풀려지면서 생생

하게 재생된다. 그것이 사랑이 시킨 일이라면 어찌 그 글씨에서 “그대

 키운 연못 고기들이/ 갑자기 반기며 뛰노는” 활기가 느껴지지 않으랴.

“귀 익은 발자국 소리 들리고/ 그대 모습”이 어찌 보이지 않으랴.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으면 그 모습과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사라질

것 같아 떨리지 않으랴. 읽고 또 읽으며 봉투 속으로 사라지려는 사람을

다시 꺼내 붙잡고 싶지 않으랴. 사랑을 전하는 말은, 얇은 종이에 펜 자

국이 푹푹 들어가는, 읽을 때마다 그 펜 자국이 감정으로 변역되는,

편지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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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19.월요일  경향신문 경향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