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은영 2015. 4. 20. 14:05

 

공  속의 허공

    시인 : 채필녀 (1958~ )

 

공이  대문 한쪽에 놓여 있다

저 공, 운동장 한구석에서 주워왔다

그 한구석도 어딘가에서 굴러왔을 것이다

또 어딘가에서 또 어딘가에서 왔을 것이다

무심하게 놓여진 공은 또 어딘가로

가고 있을 것이다

 

공은 한 번도 스스로 굴러본 적이 없다

우주가 돌라가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엄마의 큰 보폭에 아이가 종종종 발짝을 맞추듯

카다란 톱니에 작은 톱니가 맞물리듯이

둥그런 우주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지구와 공이 겨우 이마를 맞대거나

손가락 하나 걸고 있는 듯 아슬아슬하다

어쩌면 공은 새처럼 나무처럼 살고 싶어

빈 가죽부대로 바려지고 싶은지도 모른다

팽팽한 긴장에서 벗어나고 싶은지도 모른다

 

공의 상처를 본다

제 몸을 터질 듯 솟구쳐 승리에 도취하기도 했던,

함정에 빠져 패배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공의 내면이 궁금하다

공기가, 공의 몸이 될 수 있을까

살이 되고 세포가 될 수 있을까

공의 몸이 허공으로 풀어지고 있다

공의 중심이 허공의 중심을 채우고 있다

붉은 살이 서쪽 능선을 넘고 있다

공이 제 몸인 허공을 보고 있다

허공은 언젠가 공의 몸이 되어

굴러가고 또 굴러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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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20 동아일보 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