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은영 2012. 6. 23. 11:33

 

 

 

14세기에 영국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 때 프랑스의 칼레시()를 구한 영웅적 시민들의 기념상이다. 1347년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군에 의해 북부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시가 점령되고, 이에 저항한 시민들은 영국군에 의해 학살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시장을 비롯한 시민 대표 6명이 칼레시를 구하기 위하여 교수형을 각오하고 스스로 목에 밧줄을 감고 에드워드 앞으로 출두하였다. 에드워드는 이들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모두 사면하고 칼레시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1884년 칼레시는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상 제작을 로댕에게 의뢰하였다. 그러나 로댕이 완성한 조각은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같은 애국적 영웅의 늠름한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에 표현된 6인의 인물은 칼레시에 대한 헌신적 정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의 딜레마에 고민하고 각자가 각각 자기와의 싸움에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한 사람 한 사람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초인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거기에 있다. 로댕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각 인물상에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게 하여 심리적으로 각 인물을 일체화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이 6인의 군상()은 전체적인 통일 가운데 정()과 동()의 요소가 교묘하게 교차되어 각 개인의 표현이 평등하게 중요시되고 있다.      

이 기념상은 당초 칼레 시청에 설치될 예정이었으나,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바닷가 한적한 곳에 세워진 채 온갖 비난을 받았다. 당시의 칼레 시민들은 로댕의 사실주의적·상징주의적 제작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근대 조각의 위대한 개조로 불리는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파리에서 태어나 14세부터 조각 공부를 하였고, 1878년 살롱에 출품한《청동시대》의 철저한 사실성으로 해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18세기 이래 거의 장식화()된 조각에 생명의 입김과 감정을 재현하는 데 힘써 회화의 인상파와 더불어 근대 조각의 전개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