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마을/좋은 詩 감상

노래의 씨를 묻다/배한봉

파라은영 2008. 4. 29. 19:38
[경남작가 2007] 노래의 씨를 묻다
 노래의 씨를 묻다

 배한봉
 

불탄 복숭아나무 뽑아낸 자리마다 호박씨를 묻었다
첫 봄비 내린 뒤, 아직은 손이 시린
내 마음을 봄의 젖가슴 헤집어 안겨주었다
아무렇게나 뻗어나가 꽃 피울 호박넌출
밭 넘어 언덕 타고 산을 넘어
삶의 남루까지 시퍼렇게 덮으며 호박을 달고
꿈도 없는 잠보다 먼저 오라고 노래의 씨를 묻었다
구덩이 가득 눈물과 땀과 슬픈 식욕을 넣고
뼈 속에 설겅이는 마지막 겨울바람을 뚝뚝 꺾어
삼발이 세워 작은 비닐집도 만들어주었다
과수원의 황량함이 비닐집에 꽂히는 햇빛 때문에
더 눈부시게 아프다는 걸
간혹 부는 바람이 알려주었지만
노래가 어둠보다 먼저 싹 틔우리라는
믿음이 믿음을 호명하며 내 팔뚝의 솟아오른 핏줄을
뜨겁게 했다,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 해도
삶이 있는 한 우리에겐
모래알보다 작지만 끝없이 반짝이는 무엇이
언제나 남아있다
삽을 들고 다시 밭길 오르면
어느새 나보다 앞서 평온하고 너그러워진 한 사내가
천만 평 하늘에다가도 호박씨를 묻고
흘린 땀방울이 아주 오래 넉넉하게 빛나고 있었다

-'경남작가'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