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
- 김명수(1945~)

녹은 칼에 잘 슨다
녹은 새파랗게 갈아놓은 칼날에 잘 슨다
녹은 도끼에도 잘 슨다
녹은 지하실 바닥에 감추어 둔
지난달에 버려 둔 도끼날에 잘 슨다
녹은 저 혼자 힘이 겨우면
습기의 힘을 빌어서도 슨다
공기의 힘을 빌어서도 슨다
칼의 힘을 믿는 순간
도끼의 힘을 믿는 순간
녹은 제 몸과 더불어 칼날을 삭여낸다
남몰래 남몰래 쇠붙이를 삭여낸다
얼마나 다행인가. 폭력을 잠재우는 대립항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혼자 안 되면 다른 것의 힘을 빌려서라도
살의를 무력화시키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것으로도 안 되면 “제 몸과 더불어” 폭력을 삭여내는 힘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
몰래 남몰래” 폭력을 이기는 힘이 있다는 것은.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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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2.목요일.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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